[오언시] 閑中雜詠 - 釋圓鑑

오언시(五言詩) 산책
[오언시] 閑中雜詠 - 釋圓鑑
한중잡영-석원감 / 옮긴이-노주 나웅인
  • 입력 : 2024. 07.04(목) 05:00
  • 배진희 기자
나웅인 삼성한의원장
閑中雜詠
한중잡영

한가한 가운데 여러 생각

-석원감(釋圓鑑, 1226 ~ 1292)

捲箔引山色
권박인산색

발 걷어
산빛 들이고

連筒分澗聲
란통분간성

대통 이어
샘물 소리 나눈다

終朝少人到
종조소인도

아침 다하도록
오는 이 없어

杜宇自呼名
두우자호명

두견새만 홀로
제 이름 부른다

山靑仍過雨
산청잉과우

비 지나가니
산 푸르고

柳綠更含煙
류록갱함연

연초록 버드나무
안개 다시 머금었네

逸鶴閑來往
일학한내왕

평안한 학
한가로이 오가고

流鶯自後先
류앵자후선

나는 꾀꼬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溪喧山更寂
계훤산갱적

냇물 소리 요란더니
산 다시 적막하고

院靜日彌長
원정일미장

절집 고요하고
하루해 길다

採蜜黃蜂鬧
채밀황봉료

꿀 따는 누런 벌
붕붕거리고

營巢紫燕忙
영소자연망

자줏빛 제비
집 짓기 바쁘다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1226~1292)

충지의 속성은 위(魏)씨이며 속명은 원개(元凱).
몽고족의 침입과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인 고려후기
사회의 시대적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다 간 장흥 출신 스님이다.
1244년(고종31)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다.
문체가 원숙하고 뛰어나 당시 선비들이 탄복하였다 한다.
충지는 어릴적부터 속세를 떠날 뜻을 두고 관직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고려는 몽고에 반기를 든 최씨 무인정권의 항몽으로 강화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육지에 남은 백성들은 몽고와 전쟁을 치르면서
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과중한 조세 부담이라는 이중적 고통을 안았다.
충지는 그 암담한 현실을 보고
개인의 역량으로 어찌할 수 없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직면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
충지는 선원사 원오국사(禪源寺 圓悟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법명을 법환(法桓)이라고 하다가 충지(沖止)로 고쳤다.
법호를 복암노인(宓庵老人)이라 하였다.
1266년(원종7) 김해현 감로사(甘露寺) 주지로 있다가
원오국사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조계종 제6세가 되었다.
원(元)나라 세조의 요청으로 북경에 가서 세조의 극진한 대우를 받고
금란가사(金欄袈裟)·벽수장삼(碧繡長衫)·백불자(白佛子) 등을 선사 받았다.
서로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松)이 전한다
국사가 세수(世壽) 67세, 법랍(法臘) 39세로 세상을 뜨자
충열왕이 시호를 보명(寶明)이라 하였다.
원감국사 탑은 송광사 감로암에 있다.
장흥에는 그의 형제들이 줄곧 장원으로 통과하자
그 형제가 살았던 마을 뒤(장흥경찰서 뒤) 높은 봉우리를 장원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배진희 기자 news@presszon.kr     배진희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